華城 축성 총책임자로 정조의 깊은 신뢰받아  
8.채제공 정조시대 개혁정책의 리더  
[경기일보 2008-2-1]


1796년 10월16일 화성행궁 낙남헌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선녀보다 아름다운 궁중의 약방기생에서부터 사자춤과 줄타기를 보여주기 위해 찾아온 광대들까지 그저 사람들의 홍수였다. 오늘이 바로 임금님의 큰 뜻을 담은 화성(華城)의 완공을 축하하는 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그 잔치 가운데 누구보다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었다. 임금님을 대신하여 잔치를 주관하는 화성 축성의 최고책임자인 총리대신 채제공이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가 채제공의 입을 통해서 큰 소리로 울려 퍼지자 비로서 장중한 음악이 시작되었다.
정조가 가장 존경하고 신임한 신하가 있다면 단연코 채제공 선생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경기도 용인땅에 묻혀있지만 그중에서도 채제공은 특별한 인물이다. 정조대 개혁정책의 실질적 추진자였고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축성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
채제공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수원에서 용인으로 진입하여 용인 행정타운을 지나면 3군사령부로 들어가는 도로를 만나게 된다. 3군사령부에서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채제공선생 묘소 이정표가 나오고 곧 바로 작은 빌라 뒤의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잡은 묘소를 만나게 된다. 채제공이 화성유수가 되어 장용영외사가 되어 조선의 군대를 호령하였는데 그의 묘소 옆으로 3군사령부가 들어왔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다.
채제공(1720~1799)은 1720년(숙종 46) 4월6일에 충청도 홍주(현재 청양)에서 태어나 1799년(정조 23) 1월 18일 80세로 서울 미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 호는 번암 또는 번옹, 시호는 문숙이다. 효종 연간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한 채유후의 동생 채진후의 5대손으로, 부친은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채응일이고, 모친은 연안 이만성의 딸로 연원부원군 이광정의 5대손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보인 채제공은 1735년(영조 11) 15세에 이미 향시에 급제했고, 8년 뒤인 1743년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748년에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청요직인 예문관 한림을 선발하는 한림회권이 있었는데, 당시 노론과 소론의 연립정권 상황에서 소수파 남인을 추천하는 관료는 없었다. 영조 초반 정국에서 남인은 국외자 혹은 나그네 신하 정도로 대접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탕평을 포방한 영조의 특명으로 채제공에게 권점 두개를 하사해 시험를 볼 수 있는 최종 후보자 자격을 얻었고, 소시에 통과해 사관으로 선발되었다. 이는 1728년 영조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소론·남인 급진파의 반란인 무신난 평정에 공을 세운 채제공의 스승 오광운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 계승시키려 한 영조의 배려였다. 훗날 소론 재상으로 탕평주인이라 불린 조현명으로부터 북인 남태희와 함께 영조의 탕평정책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인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753년에는 충청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영조가 앞장서서 추진한 균역법의 실시 과정에서 야기된 폐단의 시정과 변방 대책을 진언했다. 1755년 소론 강경파를 제거하려는 나주괘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문사랑으로 활약했고, 그 공로로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 이때 채제공은 죄인을 포도청으로 내려보내 지나친 형벌을 가해 억지 자백을 받아낸 뒤 처벌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진언함으로써, 그런 상황에서 “공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진언을 하겠는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와 사간원 대사간을 거쳤고, 1758년 『열성지장』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국왕의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당시 채제공은 스승인 오광운을 이어서 남인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였는데, 소론 준론정파의 지도자 이종성과 연대해 사도세자와 영조의 악화된 부자관계를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특히 그해에 세자를 폐위시키겠다는 비망기가 내려졌을 때는 도승지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다. 이 때문에 후일 영조는 왕세손인 정조에게 채제공을 지적해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1770년부터 병조·예조·호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국정의 핵심 인사로 활약하였는데 그가 1772년 이후에 왕세손의 보호를 담당하는 세손우빈객이 되면서 향후 정조와 더불어 나라를 이끌어갈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조 즉위 후, 영조 말년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노·소론 외척당과 김상로·홍계희 계열 등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처단할 때, 채제공은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했다. 또 1777년 가을에 홍계회 계열의 자객이 궁궐을 침범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자, 궁궐을 수비하는 수궁대장을 한동안 맡기도 했다. 이는 그에 대한 정조가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는데 남인이 정승에 임명된 것은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정조는 “이 시기에 부른 뜻이 어찌 제멋대로이기 때문이겠는가. 지금은 불가불 열로써 열을 다스려야 하는 시기이다. 내가 최근 깊이 준비하고 헤아려서 경을 한 점의 잘못도 없는 깨끗한 위치에 두었으니, 경 또한 그 노력에 보답하는 길을 생각하라”고 말했다. 이 이열치열이란 의리를 우선하는 강경파인 준론을 함께 써서 탕평을 추진하겠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1789년(정조 13)에는 서로 양극에 서 있는 채제공과 김종수를 수반으로 정부를, 1795년(정조 19)부터는 채제공과 윤시동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출범시켰다. 바로 정조가 처음부터 의중에 두었던 정치 원칙에 투철한 정파가 주도하는 탕평 국면이었다. 이때 채제공은 황극을 세움으로써 영조 이래의 탕평책을 계속 추진할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국가 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6조를 진언했고 이를 실천하려 노력했다.


1790년에는 좌의정이자 행정부 수상이 되었고, 그해 7월 그와 함께 우의정에 임명되었던 당시 노론 주류의 영수인 김종수가 모친상을 당해 물러나자, 이후 3년 동안 독상으로 정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탕평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한 장치로 이조전랑이 가졌던 동료 추천제 및 당하관 독점 추천권을 다시 없애기도 했다. 또한 도성 안에서 물화를 독점 판매하려는 시전의 물가 조작이 계속되자, 신해통공 정책을 실시해 국가의 필수품을 담당하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독점 판매권을 없애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는 농민들의 생산물을 취급하는 일반인의 자유로운 상거래를 보장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정약용은 통공 정책 실시 이후 비로소 도성인들이 설 같은 대목에 물화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은 그를 정조의 곁에 두지 않게 하였다. 1799년 전국의 강타한 전염병의 영향으로 채제공은 정조의 개혁정책의 결실을 보지 못한채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조 역시 다음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채제공이 죽자, 정조는 그를 세상에 좀처럼 나기 어려운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인 ‘간기인물’이라 칭송했고, “나와 이 대신 사이에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홀로 아는 깊은 일치함이 있었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또 정조가 세상을 뜨기 몇 달 전인 1800년 5월에 있었던 오회연교에서는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한 이후 비로서 자신이 기대했던 탕평이 시작되었다고도 했다. 정조가 채제공을 얼마나 신뢰하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지금도 용인땅에서 화성시 안녕리에 있는 정조의 건능을 바라보고 있을 채제공의 영혼이 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채제공과 금등(金謄)>
정조의 장기적인 정국구도는 바로 수원이라는 도시를 한성에 버금가는 대도회로 만들고 그곳에 성곽을 축성하여 자신의 배후도시로 만들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당시 노론 신하들은 화성축성을 하고자 하는 정조에게 숨어있는 저의가 있다고 주장하며 화성 축성 불가를 소리높여 외쳤다. 정조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1793년 초대 화성유수로 임명한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승진발령을 내어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채제공은 영의정에 임명되자 전해 윤4월에 있었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신원하기 위한 단호한 토역(역적이나 반도를 공격해 없앰)을 함으로써 새로운 의리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이는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정권을 전담했던 노론 당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뜻이어서, 이후 벽파로 불리는 노론강경파의 집요한 공격을 야기했다. 이로 인한 심각한 대치 국면은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을 담은 영조 친필의 비밀 문서인 ‘금등’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일단 해결되었다.
이 ‘금등’ 문서는 사도세자의 모친인 정성왕후 신위 아래 감춰져 있었는데, 영조와 정조 그리고 당시 도승지였던 채제공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영조 자신의 결정이라기 보다는 노론의 김상로와 홍인한의 잘못 때문이라는 내용이 들어간 금등은 정치적으로 노론을 축출할 수 있는 커다란 무기였다. 하지만 정조는 금등 내용의 일부만 공개하고 금등을 알고 있던 채제공의 충절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결국 채제공의 상소로 인한 노론과 남인의 대립은 해소되었고 화성 축성을 반대하는 소리도 더불어 사라졌다. 당시 채제공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노론벽파 지도자 김종수조차도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견지해온 정치원칙인 의리와, 이제까지 쌓아온 국가 운영에 대한 경륜 자체는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고도로 계획된 정조와 채제공의 정치적 승리였고 이후 그는 화성 축성의 총리대신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곽을 만들었다.


담당기자 :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