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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성역화사업서 소외
천주교인 수천명 죽임당한 ‘순교의 현장’ /1. 화성에 묻혀진 핏자국
[경기일보 2007-12-24]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학자들은 정조가 수많은 반대세력을 아우르며 개혁과 주도세력 교체를 위해 벌인 최대 국책사업이 화성 축조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통합과 개혁의 역사를 간직한 화성은 정조 사후 서학 타파라는 명분으로 행해진 권력싸움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묻어있다. 본보는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화성 성역화사업에서 소외되고 있는 역사를 조명, 화성이 진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이름없는 천주교인 수천명이 화성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조 15년(1791년), 당시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 중 신주를 불사르고 가톨릭식으로 제례를 지냈다는 소문이 돌면서 처형당했다. 이것이 국내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해박해다.
선비가 유학을 배척했다는 사실은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정조는 이들의 처형과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매듭짓고 더이상 사건을 확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조는 집권 당시 성리학(주자학) 유일사상을 타파하고자 노력,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며 처단을 요구했던 신하들을 ‘성리학이 밝아지면 사학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정조실록 12년 8월6일)’이라고 반박하는 등 다원사상체제를 지향했다.
정조의 포용 아래 천주교는 기호남인과 평민을 중심으로 확산됐지만, 1800년 정조 사후 이들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게 된다. 순조 1년 신유박해(1801년), 헌종 5년 기해박해(1839년), 고종 1년 병인박해(1864년) 등 천주교 탄압은 정조 사후(1800년 이후) 수십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기록상으로 현재까지 조선시대 수원 ‘화성’에서 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이는 78명. 하지만 교계는 이름없는 이들까지 화성 순교자는 모두 2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병인치명사적 등 기록들에 따르면 당시 순교자들은 계급에 따라 화성행궁 및 이아(현 북수동성당)에서 심문한 뒤, 종로사거리에서 공개처형 당하거나 동북각루, 동남각루에서 처형당한 후 시신은 성벽 밖으로 던져지고 목은 북암문과 남암문(미복원)에 내걸렸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는 양반과 천민이 모두 평등하다는 학문적 사상이 당시 양반사회의 근간을 위협하면서 지속됐지만, 정조 사후 정순대비가 정약용 등 기호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신유박해)되는 등 늘 정치적인 목적 아래 일어났다.
특히 정조의 총애를 받은 정약용이 축조한 화성은 외국문물과 바로 접할 수 없는 내륙임에도 불구, 정약용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일찌감치 뿌리를 내리면서 수많은 이들이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원화성사업소 김준혁 학예연구사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에 우리나라 천주교의 아픈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다양한 학문을 포용했던 정조가 축조한 화성에서 그의 자유로운 생각과 가치관을 따르던 백성들이 처형당한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임성준기자 sjlim@kgib.co.kr
천주교인 수천명 죽임당한 ‘순교의 현장’ /1. 화성에 묻혀진 핏자국
[경기일보 2007-12-24]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학자들은 정조가 수많은 반대세력을 아우르며 개혁과 주도세력 교체를 위해 벌인 최대 국책사업이 화성 축조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통합과 개혁의 역사를 간직한 화성은 정조 사후 서학 타파라는 명분으로 행해진 권력싸움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묻어있다. 본보는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화성 성역화사업에서 소외되고 있는 역사를 조명, 화성이 진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이름없는 천주교인 수천명이 화성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조 15년(1791년), 당시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 중 신주를 불사르고 가톨릭식으로 제례를 지냈다는 소문이 돌면서 처형당했다. 이것이 국내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해박해다.
선비가 유학을 배척했다는 사실은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정조는 이들의 처형과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매듭짓고 더이상 사건을 확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조는 집권 당시 성리학(주자학) 유일사상을 타파하고자 노력,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며 처단을 요구했던 신하들을 ‘성리학이 밝아지면 사학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정조실록 12년 8월6일)’이라고 반박하는 등 다원사상체제를 지향했다.
정조의 포용 아래 천주교는 기호남인과 평민을 중심으로 확산됐지만, 1800년 정조 사후 이들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게 된다. 순조 1년 신유박해(1801년), 헌종 5년 기해박해(1839년), 고종 1년 병인박해(1864년) 등 천주교 탄압은 정조 사후(1800년 이후) 수십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기록상으로 현재까지 조선시대 수원 ‘화성’에서 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이는 78명. 하지만 교계는 이름없는 이들까지 화성 순교자는 모두 2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병인치명사적 등 기록들에 따르면 당시 순교자들은 계급에 따라 화성행궁 및 이아(현 북수동성당)에서 심문한 뒤, 종로사거리에서 공개처형 당하거나 동북각루, 동남각루에서 처형당한 후 시신은 성벽 밖으로 던져지고 목은 북암문과 남암문(미복원)에 내걸렸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는 양반과 천민이 모두 평등하다는 학문적 사상이 당시 양반사회의 근간을 위협하면서 지속됐지만, 정조 사후 정순대비가 정약용 등 기호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신유박해)되는 등 늘 정치적인 목적 아래 일어났다.
특히 정조의 총애를 받은 정약용이 축조한 화성은 외국문물과 바로 접할 수 없는 내륙임에도 불구, 정약용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일찌감치 뿌리를 내리면서 수많은 이들이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원화성사업소 김준혁 학예연구사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에 우리나라 천주교의 아픈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다양한 학문을 포용했던 정조가 축조한 화성에서 그의 자유로운 생각과 가치관을 따르던 백성들이 처형당한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임성준기자 sjlim@kg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