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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화성행궁의 사적 승격과 미래
[경기일보 2007-6-14]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지키고 가꾸는 파수꾼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필자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화성행궁이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경기도기념물 제65호에서 사적(史蹟) 제478호로 승격됐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유산에 대한 평가에 있어 국가지정과 도지정의 단계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화성행궁의 사적 승격은 나름대로 깊은 의미가 있기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화성행궁은 정조시대 개혁과 문화정치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1789년 수원부읍치를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에 있는 융건릉 일대에서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이전했다. 그리고 장차 수원을 현재의 행정복합도시와 같은 조선의 새로운 행정수도로 만들고자 했다. 다시 말해 1804년 정조 스스로 국왕의 자리를 세자였던 순조(純祖)에게 물려주고 수원으로 내려와 인사권·사법권·군대통수권을 통해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려고 했다. 이를 역사학계에선 정조의 ‘양경체제(兩京體制)를 통한 상왕경영론(上王經營論)’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같은 생각을 지닌 정조는 수원을 당시에 상상할 수 없는 인구 50만명의 대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농업과 상업의 진흥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 도시를 보호하고 더 나아가 청나라의 치욕을 극복하기 위한 강력한 군대 장용영외영을 주둔할 수 있게 화성을 건설했다. 그리고 화성안에 자신이 머물면서 새로운 개혁정치를 펼치기 위해 화성행궁을 만들었던 것이다.
정조는 1795년 윤 2월 화성행궁에서 어머님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과 더불어 백성들에게 몸소 쌀과 죽을 나눠 주는 행사를 화성행궁에서 베풀었다.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궁중문화와 사회복지정책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아울러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문무과(文武科) 과거시험을 치르고 활쏘기와 신무기인 매화포(埋火砲)를 터뜨려 성공시키기까지 했다. 이는 화성행궁이 조선의 인재양성과 국방개혁의 중추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략함으로써 화성행궁의 수난은 시작됐다. 1911년 ‘조선읍성철거시행령’을 통해 화성행궁은 철저히 파괴돼 군청과 경찰서, 토목관구 등 일제의 식민지 기구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해방 이후에도 화성행궁은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1989년 수원을 사랑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화성행궁 복원운동이 펼쳐져 마침내 2003년 10월 화성행궁은 전체 576칸중 482칸이 복원됐다.
이후 수원시는 화성행궁을 궁중문화의 산실이자 정조의 개혁정신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당시 사용했던 궁중기물들을 설치하고 화성행궁에서 열렸던 각종 의례들을 재현했다. 이제 화성행궁에서 매년 10월 개최되는 ‘혜경궁홍씨 회갑진찬연’과 매주 일요일 재현되는 ‘장용영 수위의식’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관광상품이 됐다.
더구나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 매일 시연되는 ‘무예24기’ 공연은 정조가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로서 조선의 무혼(武魂)을 국내외에 알리는 좋은 무형 유산이다.
화성행궁의 사적 승격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화성행궁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 가운데 하나인 ‘우화관’ 등 나머지 시설물들을 복원해야 한다. 그래야만 화성행궁이 원형의 모습을 되찾아 21세기 오늘에 정조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축복의 터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충영 수원시 화성사업소장
담당기자 : 김충영 수원시 화성사업소장 ()
[경기일보 2007-6-14]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지키고 가꾸는 파수꾼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필자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화성행궁이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경기도기념물 제65호에서 사적(史蹟) 제478호로 승격됐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유산에 대한 평가에 있어 국가지정과 도지정의 단계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화성행궁의 사적 승격은 나름대로 깊은 의미가 있기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화성행궁은 정조시대 개혁과 문화정치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1789년 수원부읍치를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에 있는 융건릉 일대에서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이전했다. 그리고 장차 수원을 현재의 행정복합도시와 같은 조선의 새로운 행정수도로 만들고자 했다. 다시 말해 1804년 정조 스스로 국왕의 자리를 세자였던 순조(純祖)에게 물려주고 수원으로 내려와 인사권·사법권·군대통수권을 통해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려고 했다. 이를 역사학계에선 정조의 ‘양경체제(兩京體制)를 통한 상왕경영론(上王經營論)’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같은 생각을 지닌 정조는 수원을 당시에 상상할 수 없는 인구 50만명의 대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농업과 상업의 진흥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 도시를 보호하고 더 나아가 청나라의 치욕을 극복하기 위한 강력한 군대 장용영외영을 주둔할 수 있게 화성을 건설했다. 그리고 화성안에 자신이 머물면서 새로운 개혁정치를 펼치기 위해 화성행궁을 만들었던 것이다.
정조는 1795년 윤 2월 화성행궁에서 어머님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과 더불어 백성들에게 몸소 쌀과 죽을 나눠 주는 행사를 화성행궁에서 베풀었다.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궁중문화와 사회복지정책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아울러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문무과(文武科) 과거시험을 치르고 활쏘기와 신무기인 매화포(埋火砲)를 터뜨려 성공시키기까지 했다. 이는 화성행궁이 조선의 인재양성과 국방개혁의 중추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략함으로써 화성행궁의 수난은 시작됐다. 1911년 ‘조선읍성철거시행령’을 통해 화성행궁은 철저히 파괴돼 군청과 경찰서, 토목관구 등 일제의 식민지 기구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해방 이후에도 화성행궁은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1989년 수원을 사랑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화성행궁 복원운동이 펼쳐져 마침내 2003년 10월 화성행궁은 전체 576칸중 482칸이 복원됐다.
이후 수원시는 화성행궁을 궁중문화의 산실이자 정조의 개혁정신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당시 사용했던 궁중기물들을 설치하고 화성행궁에서 열렸던 각종 의례들을 재현했다. 이제 화성행궁에서 매년 10월 개최되는 ‘혜경궁홍씨 회갑진찬연’과 매주 일요일 재현되는 ‘장용영 수위의식’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관광상품이 됐다.
더구나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 매일 시연되는 ‘무예24기’ 공연은 정조가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로서 조선의 무혼(武魂)을 국내외에 알리는 좋은 무형 유산이다.
화성행궁의 사적 승격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화성행궁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 가운데 하나인 ‘우화관’ 등 나머지 시설물들을 복원해야 한다. 그래야만 화성행궁이 원형의 모습을 되찾아 21세기 오늘에 정조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축복의 터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충영 수원시 화성사업소장
담당기자 : 김충영 수원시 화성사업소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