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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官衙)
Ⅰ. 관아의 의미
관원이 모여 나랏일을 돌볼 수 있는 건축물을 말하는데 순수한 우리 말로는 "마을"이라고도 한다. 또 관아를 공서(公署), 공아(公衙), 관부(官府), 관청(官廳), 관서(官署)라고도 하였는데 특히 공해(公解)라는 말은 국가적인 공무를 집행하는 건물을 뜻한다.
Ⅱ. 관아의 역사
관아건축의 시작은 아마도 사회제도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진 그리고 어느정도 틀이 잡힌 성읍국가(城邑國家)시대부터라 생각된다. 성읍국가시대의 관아건축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현재로서는 그유구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일반 백성들의 집이 움집이었던 만큼 관아 건축 또한 삼국시대의 건축과 같이 포작(包作)을 쓴 포집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신당서(新唐書)에 고구려는 궁궐과 관부, 사찰만이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라는 구절로 보아 포작집건축으로 상당한 수준의 건축이었음을 알 수 있고 안학궁지와 같은 유적으로 미루어 볼때 외부 공간구성 또한 같은 수준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제는 내관 12부, 외관 10부의 관료제도가 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비슷한 관아 건축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신라는 처음 6부족으로 시작, 점차 김씨왕권의 중앙집권적 체제로 변화하였으며 특히 골품제도라는 신분제도와 17관등의 제도가 있어 제도의 엄격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기존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정치제도의 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바 수도안에는 행정구역을 6부, 지방은 주, 군, 현으로 나누었으며 또한 여기에는 5소경을 두었다. 삼국사기 옥사(屋舍)조에 나타난 가사 규제조항을 보면, 각 계급간에는 엄격한 집의 규모, 장식제한이 있던 것으로 보아 관아 건축에 있어서도 관아의 차등에 따라 건축차등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3성과 6부가 있었고 각부 밑에 7사(寺)가 있었다. 또 지방행정제도로 전국에 12목을 두었으며 군, 현, 진을 설치하였다. 고려 도경에 의하면 고려 궁궐 정문인 광화문 앞에 상서 6부와 삼사, 고공사, 2국이 관도(官道) 좌우에 늘어서 마치 조선시대의 6조거리와 같은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말에 도입된 주자학으로 유학자들이 신흥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자연히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를 펴나가게 되어 관아 건축도 유교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정치체계는 왕권을 절정으로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유교적인 양반관료에 의하여 통치되는 유교적 관인 지배체제였다. 중앙에는 고려제도를 답습하다가 태종 5년에 관제의 완성을 본바 문관(동반)과 무관(서반)으로 관료를 나누고 경관직을 두며 지방에는 외관직을 두었다. 최고의 통치기관으로는 의정부를 두고 그 아래 6조를 두었다. 또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예문관, 춘추관, 홍문관등이 있었다. 지방관제는 8도로 나누고, 부, 대도호부, 군, 현을 두고 이를 맡아 관리하는 관료로 관찰사, 부윤, 대도호부사,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을 두었다.
Ⅲ. 관아의 분류
관아는 크게 중앙 관아건축과 지방 관아건축으로 분류된다.
1.중앙 관아건축
서울에는 정궁인 경복궁과 광화문 좌우쪽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등 각 사(司)의 공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즉 관화문 남쪽 좌우에는 이들 관아들이 들어선 6조거리가 조성된 것이었다. 이들의 위치는 광화문 남편 동쪽 첫머리에 의정부, 그 남쪽으로 이조, 한성부 ,호조가 자리잡고 서쪽 뒷머리에 예조, 그 남쪽으로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있었다.
2.지방 관아건축
지방 관아건축에는 관찰사가 정부를 보던 감영(監營)과 부, 대도호부, 목, 군, 현으로 나누어 지는 관찰사 아래 행정단위의 수령들이 집무하던 어떤 몸체인 동헌(東軒)이 있다.
Ⅳ. 관아의 공간 구성
1.중앙관아의 공간구성(조선시대)
1)의정부
유구가 없어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육조거리에 면하여 솟을삼문 형식의 외삼문형식으로 외삼문을 세우고 이의 좌우에 회랑을 둘렀으며 중앙의 정청(正廳)을 높게 하고 좌우로 한 단 낮은 좌우의 익헌(翼軒)을 두어 위엄있는 모습을 이루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 서남쪽에 행랑 수십칸이 있는데 남쪽 행랑들이 백관들의 서계를 받는 곳이다. 사인사가 북쪽에 있는데 청풍각(淸風閣)이라 현판하였으며 연못이 있다." 라 하였고 임원 경제지 섬룡지 권 1, 영조지제 정제(庭際), 화계(花階)항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성의 의정부 뜰을 보니 돌계단이 있는데 담황석(淡黃石)과 미자석을 이용하여 앞부분만을 고르고 바르게 갈아서 다듬고 나머지 면은 뽀족하고 비스듬하고 모가나서 각이진 상태 그대로 모아 두었다. 누런색과 붉은... 가요문을 만들어 놓아 고아한 정관을 흠뻑 자랑하고 있으니 모방할 만하다."하였다
2)호조
탁지지(度支志)에 전체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전체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앞은 대문과여러 행랑채들이 있고,뒤쪽은 정청과 후원을 행랑이 둘러싸고 있음을 볼 수있다. 행랑채사이는 크고 작은 마당으로 구성되나,정청 뒷쪽만은 연못과 정자로 구성되어 관리들의 휴식공간을 마련한 것을 알수 있다.
3)형조
추관지(秋官志)에 전체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여기는 정청 앞마당의 구성이 특색있다.즉,대문으로부터 삼문(三門)에 이르는 바깥마당을 구성하는 모습은 단순할 뿐 그 기본은 중문인 삼문(三門)으로부터 중앙에 있는 당상청사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즉,석줄의 길이 나있고 오른쪽에 가석(嘉石), 왼쪽에 폐석(肺石)을 세워 놓은 것이 다르다.가석은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돌로 주례(主禮)에 따르면, 범죄가 가벼운 자는 앉혀서 아름다운 돌무늬를 보게 하여 잘못을 뉘우치게 하며,폐석은 붉은 돌로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이 돌옆에 서 있으면 관원이 그 사람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한편, 중앙관아에 대해서는 겸제 정선이 그린 의금부 그림이 있고 또,종친부,삼군부의 총무당과 청헌당 건물이 남아 있으나 몸채 일부와 또,이들이 다른 장소로 이건된 관계로 외부공간구성에 대해서는 자세하고 확실한 내용을 알 길이 없다.
2.지방관아의 공간구성
1)감영(監營)
지방관의 으뜸으로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곳으로 이 감영에는 감사본아(監司本衙)로 상방,청옥,행랑,각종 누고,도사청,부관청,육방청 등 큰 규모로 여러칸의 집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심건물은 보통 선화당(宣化堂)이라 한다.다음 서윤본아(庶尹本衙)로 청옥,동서협실,동서익헌,루옥,중행랑 등 여러칸의 건물들이 있고 판관본아(判官本衙)로서 비슷한 칸주의 건물들이 있었다.호암미술관 소장의 "경기감영도"에서는 중층누문인 "기영포정문(畿營布政門)"의 아랫층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으로 둘러막은 장방형 마당에 들어서게 되고 이 행랑마당 앞쪽 동쪽의 문을 들어서면 선화당 앞쪽 행랑마당에 이르게 되며 북쪽문을 들어서면 이름모를 큰 집과 그 뒷쪽에 자리잡은 신당(神堂)에 이르게 된다. 중심건물인 선화당은 누문마당 동측으로 난 대문을 통하여 일단 장방형의 행랑마당으로 들어선 후 다시 북쪽 행랑 중앙에 자리잡은 삼문으로 들어서는 넓은 마당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삼문부터 당의 대청 앞 기단까지는 도ㄹ을 깔아 마무리한 돌길이 나있고 이길의 동측에는 앞에서 말한 가석(嘉石)이 서측에는 폐석(肺石)이 서 있고,팔작기와집으로 그려져 있다. 삼문 안쪽 동쪽모퉁이에 이름모를 큰 나무가 한 그루 서있고 당의 뒤쪽으로는 연못이 그려져 있다. 또한 여기에는 수풀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후원(後苑)이 꾸며졌음을 알 수있다.선화당의 동측, 행랑으로 둘러싼 마당에는 관풍각(觀風閣)이 자리잡고 이의 앞쪽으로 영이청(營吏廳)이, 뒷쪽으로는 내아(內衙)가 자리잡고 있다.한편,내아 뒷쪽 깊은 곳에는 사우(祠宇)가 있는데 이는 앞서의 신당과는 달리 감찰사로 부임된 사람의 가묘(家廟)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고 추측된다.경기감영의 외각 행랑 밖 동측으로 외삼문과 내삼문,그리고 담장으로 둘러싼 기영빈관(畿營賓官)이 있는데, 경기감영이 한성에 있던 관계로 객사(客舍)가 따로 건립되지 않은 이유에서 이 빈관이 건립되었다고 생각된다.이상과 같이 경기감영도를 통하여 지방관아의 으뜸인인 감영의 공간구성을 살펴본 바,넓은 집터 주위의 행랑과 담장으로 둘러막고 그 속에 다시 각종의 몸채를 세우고, 몸채둘레를 다시 행랑채로 구획하여 크고 작은 여러 마당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또한 집터는 뒤쪽으로 가면서 높아지는 관계로 이는 행랑의 기단과 행랑에 세운 대문의 기단 높낮이,몸채의 기단 높낮이,담장의 높낮이로서 자연스럽게 조절하여,각 공간을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마당의 마감은 흙바닥마감이고,다만 선화당 대청 기단까지는 돌길을 만들고,돌길 좌우에 가석과 폐석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마당의 모퉁이에는 나무를 한 두 그루 심었으며 뒷쪽 산밑쪽으로는 연못,원림을 조성,후원을 꾸몄음을 알 수 있다.
2)동헌(東軒)
조선 영조시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전국에 334개의 읍(邑)이 있었는데 이들은 부,대도호부,목,군,현으로 나누어지는 관찰사 아래의 행정단위였다. 이 행정단위의 수령들이 집무하던 으뜸몸채가 동헌이고, 안살림을 맡아하던 몸채가 내아(內衙)이다. 관아건축은 대개 읍성안 북쭉 중심부에 자리잡는데 동헌은 그곳에서 서쪽에, 객사(客舍)는 동쪽에 자리잡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상주(尙州)성도를 보면 외삼문인 태평루를 들어서면 내삼문까지 넓은 마당을 형성하고 이마당 동쪽에 작청(作廳)과 군사청(軍事廳)이, 서쪽에는 사령청(使令廳)이 자리잡고 있다. 내삼문은 좌우로 행랑을 두고,솟을대문으로 세워졌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다시 넓은 마당이 나오고, 마당북쪽으로 동헌인 청유당(聽猶堂)이 자리잡고 동헌의 동쪽에는 공고(工庫)가, 서쪽에는 내아(內衙)가 자리잡고 있다.또,객사인 상산관(尙山官)은 동헌 동쪽 넓은 터에 따로 쌓은 담장속에 자리잡고 있다.객사는 원래, 정청(正廳)에 임금님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 보름마다 향궐망배(向闕望拜)하는 곳으로 궁궐의 성격을 가진 곳이므로 동헌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Ⅰ. 관아의 의미
관원이 모여 나랏일을 돌볼 수 있는 건축물을 말하는데 순수한 우리 말로는 "마을"이라고도 한다. 또 관아를 공서(公署), 공아(公衙), 관부(官府), 관청(官廳), 관서(官署)라고도 하였는데 특히 공해(公解)라는 말은 국가적인 공무를 집행하는 건물을 뜻한다.
Ⅱ. 관아의 역사
관아건축의 시작은 아마도 사회제도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진 그리고 어느정도 틀이 잡힌 성읍국가(城邑國家)시대부터라 생각된다. 성읍국가시대의 관아건축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현재로서는 그유구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일반 백성들의 집이 움집이었던 만큼 관아 건축 또한 삼국시대의 건축과 같이 포작(包作)을 쓴 포집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신당서(新唐書)에 고구려는 궁궐과 관부, 사찰만이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라는 구절로 보아 포작집건축으로 상당한 수준의 건축이었음을 알 수 있고 안학궁지와 같은 유적으로 미루어 볼때 외부 공간구성 또한 같은 수준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제는 내관 12부, 외관 10부의 관료제도가 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비슷한 관아 건축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신라는 처음 6부족으로 시작, 점차 김씨왕권의 중앙집권적 체제로 변화하였으며 특히 골품제도라는 신분제도와 17관등의 제도가 있어 제도의 엄격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기존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정치제도의 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바 수도안에는 행정구역을 6부, 지방은 주, 군, 현으로 나누었으며 또한 여기에는 5소경을 두었다. 삼국사기 옥사(屋舍)조에 나타난 가사 규제조항을 보면, 각 계급간에는 엄격한 집의 규모, 장식제한이 있던 것으로 보아 관아 건축에 있어서도 관아의 차등에 따라 건축차등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3성과 6부가 있었고 각부 밑에 7사(寺)가 있었다. 또 지방행정제도로 전국에 12목을 두었으며 군, 현, 진을 설치하였다. 고려 도경에 의하면 고려 궁궐 정문인 광화문 앞에 상서 6부와 삼사, 고공사, 2국이 관도(官道) 좌우에 늘어서 마치 조선시대의 6조거리와 같은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말에 도입된 주자학으로 유학자들이 신흥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자연히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를 펴나가게 되어 관아 건축도 유교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정치체계는 왕권을 절정으로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유교적인 양반관료에 의하여 통치되는 유교적 관인 지배체제였다. 중앙에는 고려제도를 답습하다가 태종 5년에 관제의 완성을 본바 문관(동반)과 무관(서반)으로 관료를 나누고 경관직을 두며 지방에는 외관직을 두었다. 최고의 통치기관으로는 의정부를 두고 그 아래 6조를 두었다. 또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예문관, 춘추관, 홍문관등이 있었다. 지방관제는 8도로 나누고, 부, 대도호부, 군, 현을 두고 이를 맡아 관리하는 관료로 관찰사, 부윤, 대도호부사,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을 두었다.
Ⅲ. 관아의 분류
관아는 크게 중앙 관아건축과 지방 관아건축으로 분류된다.
1.중앙 관아건축
서울에는 정궁인 경복궁과 광화문 좌우쪽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등 각 사(司)의 공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즉 관화문 남쪽 좌우에는 이들 관아들이 들어선 6조거리가 조성된 것이었다. 이들의 위치는 광화문 남편 동쪽 첫머리에 의정부, 그 남쪽으로 이조, 한성부 ,호조가 자리잡고 서쪽 뒷머리에 예조, 그 남쪽으로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있었다.
2.지방 관아건축
지방 관아건축에는 관찰사가 정부를 보던 감영(監營)과 부, 대도호부, 목, 군, 현으로 나누어 지는 관찰사 아래 행정단위의 수령들이 집무하던 어떤 몸체인 동헌(東軒)이 있다.
Ⅳ. 관아의 공간 구성
1.중앙관아의 공간구성(조선시대)
1)의정부
유구가 없어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육조거리에 면하여 솟을삼문 형식의 외삼문형식으로 외삼문을 세우고 이의 좌우에 회랑을 둘렀으며 중앙의 정청(正廳)을 높게 하고 좌우로 한 단 낮은 좌우의 익헌(翼軒)을 두어 위엄있는 모습을 이루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 서남쪽에 행랑 수십칸이 있는데 남쪽 행랑들이 백관들의 서계를 받는 곳이다. 사인사가 북쪽에 있는데 청풍각(淸風閣)이라 현판하였으며 연못이 있다." 라 하였고 임원 경제지 섬룡지 권 1, 영조지제 정제(庭際), 화계(花階)항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성의 의정부 뜰을 보니 돌계단이 있는데 담황석(淡黃石)과 미자석을 이용하여 앞부분만을 고르고 바르게 갈아서 다듬고 나머지 면은 뽀족하고 비스듬하고 모가나서 각이진 상태 그대로 모아 두었다. 누런색과 붉은... 가요문을 만들어 놓아 고아한 정관을 흠뻑 자랑하고 있으니 모방할 만하다."하였다
2)호조
탁지지(度支志)에 전체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전체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앞은 대문과여러 행랑채들이 있고,뒤쪽은 정청과 후원을 행랑이 둘러싸고 있음을 볼 수있다. 행랑채사이는 크고 작은 마당으로 구성되나,정청 뒷쪽만은 연못과 정자로 구성되어 관리들의 휴식공간을 마련한 것을 알수 있다.
3)형조
추관지(秋官志)에 전체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여기는 정청 앞마당의 구성이 특색있다.즉,대문으로부터 삼문(三門)에 이르는 바깥마당을 구성하는 모습은 단순할 뿐 그 기본은 중문인 삼문(三門)으로부터 중앙에 있는 당상청사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즉,석줄의 길이 나있고 오른쪽에 가석(嘉石), 왼쪽에 폐석(肺石)을 세워 놓은 것이 다르다.가석은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돌로 주례(主禮)에 따르면, 범죄가 가벼운 자는 앉혀서 아름다운 돌무늬를 보게 하여 잘못을 뉘우치게 하며,폐석은 붉은 돌로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이 돌옆에 서 있으면 관원이 그 사람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한편, 중앙관아에 대해서는 겸제 정선이 그린 의금부 그림이 있고 또,종친부,삼군부의 총무당과 청헌당 건물이 남아 있으나 몸채 일부와 또,이들이 다른 장소로 이건된 관계로 외부공간구성에 대해서는 자세하고 확실한 내용을 알 길이 없다.
2.지방관아의 공간구성
1)감영(監營)
지방관의 으뜸으로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곳으로 이 감영에는 감사본아(監司本衙)로 상방,청옥,행랑,각종 누고,도사청,부관청,육방청 등 큰 규모로 여러칸의 집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심건물은 보통 선화당(宣化堂)이라 한다.다음 서윤본아(庶尹本衙)로 청옥,동서협실,동서익헌,루옥,중행랑 등 여러칸의 건물들이 있고 판관본아(判官本衙)로서 비슷한 칸주의 건물들이 있었다.호암미술관 소장의 "경기감영도"에서는 중층누문인 "기영포정문(畿營布政門)"의 아랫층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으로 둘러막은 장방형 마당에 들어서게 되고 이 행랑마당 앞쪽 동쪽의 문을 들어서면 선화당 앞쪽 행랑마당에 이르게 되며 북쪽문을 들어서면 이름모를 큰 집과 그 뒷쪽에 자리잡은 신당(神堂)에 이르게 된다. 중심건물인 선화당은 누문마당 동측으로 난 대문을 통하여 일단 장방형의 행랑마당으로 들어선 후 다시 북쪽 행랑 중앙에 자리잡은 삼문으로 들어서는 넓은 마당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삼문부터 당의 대청 앞 기단까지는 도ㄹ을 깔아 마무리한 돌길이 나있고 이길의 동측에는 앞에서 말한 가석(嘉石)이 서측에는 폐석(肺石)이 서 있고,팔작기와집으로 그려져 있다. 삼문 안쪽 동쪽모퉁이에 이름모를 큰 나무가 한 그루 서있고 당의 뒤쪽으로는 연못이 그려져 있다. 또한 여기에는 수풀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후원(後苑)이 꾸며졌음을 알 수있다.선화당의 동측, 행랑으로 둘러싼 마당에는 관풍각(觀風閣)이 자리잡고 이의 앞쪽으로 영이청(營吏廳)이, 뒷쪽으로는 내아(內衙)가 자리잡고 있다.한편,내아 뒷쪽 깊은 곳에는 사우(祠宇)가 있는데 이는 앞서의 신당과는 달리 감찰사로 부임된 사람의 가묘(家廟)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고 추측된다.경기감영의 외각 행랑 밖 동측으로 외삼문과 내삼문,그리고 담장으로 둘러싼 기영빈관(畿營賓官)이 있는데, 경기감영이 한성에 있던 관계로 객사(客舍)가 따로 건립되지 않은 이유에서 이 빈관이 건립되었다고 생각된다.이상과 같이 경기감영도를 통하여 지방관아의 으뜸인인 감영의 공간구성을 살펴본 바,넓은 집터 주위의 행랑과 담장으로 둘러막고 그 속에 다시 각종의 몸채를 세우고, 몸채둘레를 다시 행랑채로 구획하여 크고 작은 여러 마당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또한 집터는 뒤쪽으로 가면서 높아지는 관계로 이는 행랑의 기단과 행랑에 세운 대문의 기단 높낮이,몸채의 기단 높낮이,담장의 높낮이로서 자연스럽게 조절하여,각 공간을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마당의 마감은 흙바닥마감이고,다만 선화당 대청 기단까지는 돌길을 만들고,돌길 좌우에 가석과 폐석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마당의 모퉁이에는 나무를 한 두 그루 심었으며 뒷쪽 산밑쪽으로는 연못,원림을 조성,후원을 꾸몄음을 알 수 있다.
2)동헌(東軒)
조선 영조시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전국에 334개의 읍(邑)이 있었는데 이들은 부,대도호부,목,군,현으로 나누어지는 관찰사 아래의 행정단위였다. 이 행정단위의 수령들이 집무하던 으뜸몸채가 동헌이고, 안살림을 맡아하던 몸채가 내아(內衙)이다. 관아건축은 대개 읍성안 북쭉 중심부에 자리잡는데 동헌은 그곳에서 서쪽에, 객사(客舍)는 동쪽에 자리잡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상주(尙州)성도를 보면 외삼문인 태평루를 들어서면 내삼문까지 넓은 마당을 형성하고 이마당 동쪽에 작청(作廳)과 군사청(軍事廳)이, 서쪽에는 사령청(使令廳)이 자리잡고 있다. 내삼문은 좌우로 행랑을 두고,솟을대문으로 세워졌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다시 넓은 마당이 나오고, 마당북쪽으로 동헌인 청유당(聽猶堂)이 자리잡고 동헌의 동쪽에는 공고(工庫)가, 서쪽에는 내아(內衙)가 자리잡고 있다.또,객사인 상산관(尙山官)은 동헌 동쪽 넓은 터에 따로 쌓은 담장속에 자리잡고 있다.객사는 원래, 정청(正廳)에 임금님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 보름마다 향궐망배(向闕望拜)하는 곳으로 궁궐의 성격을 가진 곳이므로 동헌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