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수 37
http://kyujanggak.snu.ac.kr/jungjo/jungjo1.htm정조 그 시대와 문화
원본 : 규장각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라 불리는 18세기 후반의 정계와 학계를 주도했던 학자군주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11세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후 왕세손이자 동궁으로 있던 14년 동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학문 연마에 몰두했다. 1776년에 왕위에 오른 25세의 청년 정조의 학문은 이미 당대 학자들을 이끌만한 수준이었고, 이후 24년 3개월간 국왕으로 있으면서 조선을 찬란한 문화국가로 만들었다.
정조의 문화정책에서 중심이 되는 기관은 규장각이었다. 정조가 국왕에 오른 직후 창덕궁에 설치한 규장각은 처음에는 왕실 도서관과 학술 연구기관으로 출발하였지만, 1780년대에 들어와 초계문신제를 실시하면서 본격적인 인재 양성기관이 되었다. 규장각을 거쳐간 문신들은 이후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정조가 의도한 개혁정치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인적자원이 되었다. 정조가 집권한 18세기 후반은 사회 전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던 격동의 시대였다. 정조는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론을 견지하면서 유일한 중화국가로 남은 조선의 문화적 우수성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리고 서울 및 지방에 묻혀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발탁하기 위해 지방 현지에 중앙관리를 파견하여 과거를 치렀다. 국왕이 왕릉을 참배하기 위해 나선 길에서는 백성들의 민원 사항을 접수하여 처리했고, 국왕이 직접 방문하지 못하는 지역에는 왕명을 받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감찰 활동을 했다. 농업 정책에서는 새로운 농서를 정리하고 보급하였으며,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하는 등 사회 전 분야의 개혁에 몰두하였다.
정조대는 경제적 풍요와 함께 문화와 예술이 꽃 피운 시기이다. 음악, 글씨, 그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산천과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표현한 진경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양반은 물론이고 서얼과 중인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각 분야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드러내고 이를 향유했다. 한편, 서울을 중심으로 도시화, 상업화가 진전되는 속에서 백성들의 생활도 향상되었다. 그러나 일부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사치풍조가 만연하여 이를 제한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정조대의 문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출판문화이다. 정조 자신이 방대한 저술을 남긴 학자군주인데다가 규장각 학자의 학문 연구를 통해 많은 성과가 나왔고, 규장각의 출판 기능을 통해 다양한 서적들이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정조대에는 서적의 인쇄를 위해 여러 종류의 활자를 만들었고 책의 내용에 따라 활자를 골라 인쇄했다. 또한 책의 속표지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고 책의 내용에 부합하는 의미를 가진 도장을 찍어 책 자체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었다.
정조 개인의 일생은 고단하고 험난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는 그의 발언처럼 정조는 성군(聖君)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했던 학자요 군주였으며, 그런 국왕의 노력이 있었기에 조선은 마침내 문예부흥의 황금기를 이룩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국가간의 장벽이 급속도로 낮아지는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민족이나 국가의 개성을 보여주는 전통문화는 더욱 그 진가를 발하고 있다. 정조대에 나타난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들은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면서, 미래 사회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이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책무를 던져주고 있다.
원본 : 규장각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라 불리는 18세기 후반의 정계와 학계를 주도했던 학자군주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11세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후 왕세손이자 동궁으로 있던 14년 동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학문 연마에 몰두했다. 1776년에 왕위에 오른 25세의 청년 정조의 학문은 이미 당대 학자들을 이끌만한 수준이었고, 이후 24년 3개월간 국왕으로 있으면서 조선을 찬란한 문화국가로 만들었다.
정조의 문화정책에서 중심이 되는 기관은 규장각이었다. 정조가 국왕에 오른 직후 창덕궁에 설치한 규장각은 처음에는 왕실 도서관과 학술 연구기관으로 출발하였지만, 1780년대에 들어와 초계문신제를 실시하면서 본격적인 인재 양성기관이 되었다. 규장각을 거쳐간 문신들은 이후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정조가 의도한 개혁정치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인적자원이 되었다. 정조가 집권한 18세기 후반은 사회 전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던 격동의 시대였다. 정조는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론을 견지하면서 유일한 중화국가로 남은 조선의 문화적 우수성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리고 서울 및 지방에 묻혀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발탁하기 위해 지방 현지에 중앙관리를 파견하여 과거를 치렀다. 국왕이 왕릉을 참배하기 위해 나선 길에서는 백성들의 민원 사항을 접수하여 처리했고, 국왕이 직접 방문하지 못하는 지역에는 왕명을 받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감찰 활동을 했다. 농업 정책에서는 새로운 농서를 정리하고 보급하였으며,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하는 등 사회 전 분야의 개혁에 몰두하였다.
정조대는 경제적 풍요와 함께 문화와 예술이 꽃 피운 시기이다. 음악, 글씨, 그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산천과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표현한 진경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양반은 물론이고 서얼과 중인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각 분야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드러내고 이를 향유했다. 한편, 서울을 중심으로 도시화, 상업화가 진전되는 속에서 백성들의 생활도 향상되었다. 그러나 일부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사치풍조가 만연하여 이를 제한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정조대의 문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출판문화이다. 정조 자신이 방대한 저술을 남긴 학자군주인데다가 규장각 학자의 학문 연구를 통해 많은 성과가 나왔고, 규장각의 출판 기능을 통해 다양한 서적들이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정조대에는 서적의 인쇄를 위해 여러 종류의 활자를 만들었고 책의 내용에 따라 활자를 골라 인쇄했다. 또한 책의 속표지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고 책의 내용에 부합하는 의미를 가진 도장을 찍어 책 자체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었다.
정조 개인의 일생은 고단하고 험난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는 그의 발언처럼 정조는 성군(聖君)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했던 학자요 군주였으며, 그런 국왕의 노력이 있었기에 조선은 마침내 문예부흥의 황금기를 이룩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국가간의 장벽이 급속도로 낮아지는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민족이나 국가의 개성을 보여주는 전통문화는 더욱 그 진가를 발하고 있다. 정조대에 나타난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들은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면서, 미래 사회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이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책무를 던져주고 있다.

